* 사단법인 평화캠프 서울지부는 포이동 재건마을(현 개포동 1266번지) 주민 인터뷰 자원활동, ‘포이동 사람책 프로젝트’를 2015년 하반기에 진행하였습니다. 구술을 토대로 각각의 주민들의 삶의 이야기를 듣고, 마을의 역사와 주민들의 개인사를 엮어내는 것이 이 프로젝트의 목표였습니다. 더불어 포이동 재건마을에 대한 여론을 환기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포이동 인연공부방으로 향했던 우리는 19일, 안타까운 소식을 접했습니다. 포이동 재건마을의 주민 한 분이 돌아가셨습니다. 사시던 집이 마을회관 옆, 공부방과도 가까워 자주 얼굴을 마주치며 인사를 나누던 마을주민 故유도관 님이셨습니다. 20일, 강남구청은 장례도 치르기 전에 사시던 집을 공가 조치하러 왔다가 주민들의 항의로 사과 후 돌아가기도 했습니다. 평화캠프 <포이동 사람책> 두 번째 이야기는 독재정권 시절부터 지금까지 30여 년을 넘게 살아오던 집조차 인정받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신 故유도관 님을 추모하며 그분의 삶을 이야기합니다.

함께 했던 시간들을 잊지 않겠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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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화재 이후, 주거권을 지키려 나선 모습_사진:박김형준] 

 

할아버지가 되어 꾸는 꿈

– 꿈이 없는 아이, 꿈꾸는 할아버지

 

꿈이 없는 아이

“첫돌 전에 양친 부모가 다 떠나셨어요.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어머님은 개가하시고요. 할머니 손에서 자라다 6·25전쟁이 끝날 무렵 할머니도 돌아가셨어요. 그때서부터 서울로 올라와 객지생활을 하게 됐습니다.”

포이동 주민 유도관 씨가 충주에서 상경한 나이는 일곱 살. 아이는 빈 깡통을 들고 동냥 밥을 구하러 다녔다. 거리에는 비슷한 처지의 아이들이 많았다. 전쟁고아거나 부모가 있어도 보살핌을 받기 어려운 아이들이었다.

“행색이 추하니까 보면 집 없는 게 대번 나오잖아요. 남대문, 청진동… 여러 군데서 같이 생활했어요. 어느 왕초랑 있건 생활 자체는 다르지 않았어요. 없이 밥 얻으러 돌아다니니 항상 불편했죠.”

거리의 아이들은 ‘부랑아’라 불렸다. 이들은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였지만 그래도 당시엔 부랑아를 전쟁이 낳은 사회문제로 여기는 인식이 있었다. 언론은 정부를 탓했고 정부는 부랑아를 시야에서 없애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한 달에 한 번씩 시내 각 경찰서에서 ‘후리가리’(집중단속)를 했어요. ‘쓰리 쿼터’라는 군용차에 애들을 몰아넣고 고아원으로 보냈죠. 가면 그 안에도 위아래가 있어서, 오래 지내며 신임을 얻은 통장·반장이 우리를 감시하고 관리했어요. 개네들은 학교도 다니고 바깥에 왔다 갔다 할 수 있었는데 우리 같은 애들한텐 그곳이 철창 없는 감옥이었어요. 들어가면 나오고 들어가면 나오고.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도망치고 또 잡혀 들어갔어요.”

고아원을 들락날락하며 유도관 씨는 신문을 팔고 구두를 닦고 폐품을 주웠다. 일해서 번 돈은 밥값을 빼고 모두 왕초에게 바쳐야 했다. 그날 벌어 그날을 사는 생활이 반복됐다. 왕초한테서 여러 번 도망쳐봤지만, 매번 사대문도 벗어나기 전에 붙들렸다. 하루살이 같은 삶은 더 나은 미래를 상상할 수 없게 했다.

빼앗긴 이름

정부는 1962년 자활근로대를 창설하며 넝마주이를 직접 관리하기 시작했다. 물론 왕초나 왕초에게 착취당하는 아이들을 위한 건 아니었다. 목적은 크게 두 가지. 예비범죄자 관리와 재활용사업이란 일종의 지하경제를 양성화하는 것이었다. 담당 경찰은 왕초를 대신했을 뿐 조금도 나은 구석이 없었다. 경찰이 그들을 관리하고 착취했다.

“시내 공터에 천막을 치고 군 내무반 식으로 해놓고 살았어요. 이름만 생겼지 생활은 다른 게 없었어요. 왕초 대신 경찰이 관리했을 뿐이에요. 할당량을 주고 못 채우면 심하게 야단쳤어요. 종이를 많이 주워가도 저금해준다며 밥값밖에 안 줬어요. 그걸 한 번도 찾아본 적이 없어요. 다 경찰들이 찾아가 버렸지. 찾은 애들도 있을 수도 있겠지만 거의 경찰들이 빼간 거로 알고 있어요.”

경찰은 그들의 이름도 빼앗아갔다. 한 명 한 명 번호를 매겨 신상정보를 경찰서에 기록해놓고 이름 대신 번호를 불렀다.

“망태기에다 페인트로 큼지막하게 번호를 쓰고 그 번호로 불렀어요. 그러면 나의 이름은 없어져요. 지금 생각하면 치욕적인 건데 그런 생활을 하면서 여태까지 살아남았어요.”

징역 12년 6개월

정부는 넝마주이를 예비범죄자로 보고 리스트를 작성해서 관리한 거지만 곧잘 목적과는 반대로 실적을 채우기 위해 그들에게 누명을 씌웠다.

“하루는 고아원 친구가 하던 시장에서 놀다 돌아왔는데 경찰이 무작정 잡는 거예요. 영문도 모르고 파출소에 끌려가니 먼저 잡혀간 동료들이 있었어요. 알고 보니 전날 하룻저녁에 열두 가구가 털렸는데 그걸 우리한테 뒤집어씌우려는 거였어요. ‘네가 하지 않았느냐’며 고문을 하는데, 고문받으면 어떤 얘기든지 ‘그렇다’고 나오게 돼 있어요. 고춧가루 타서 물고문하고 잠 안 재우고, 어떤 사람한텐 수갑을 꽉 물어놔서 손이 쏙 빠지게 하고. 그땐 그게 다 합법적인 셈이었어요. 우릴 고문한다고 뭐라 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으니까요.”

당시 사건으로 유도관 씨는 2년간 교도소에 갇혔다. 이런 일은 빈번히 일어났다. 총 12년 6개월을 징역살이로 보냈다고 말하는 그의 얼굴엔 분노가 서려 있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무언가 께름칙한 듯 말을 덧붙였다.

“다 억울하게 간 건 아니고 개중엔 실제로 잘못해서 간 적도 있어요. 공사판에서 못 쓰는 작은 철근 덩어리를 몇 개 가져와서 징역 1년 6개월 살았죠.  세멘 남은 거 좀 가져와도 징역 가고 그랬어요.”

강제 이주, 부끄러운 존재

“밤중에 발로 툭툭 차서 깨우더니 강제로 붙들어다 한 곳에 옮겨 놨어요.”

81년 3월 정보사 뒷산에 한데 수용됐던 천여 명의 넝마주이는 그해 12월 하룻밤 새 10곳으로 흩어졌다. 유도관 씨는 처음에 고속버스터미널 뒤쪽으로 옮겨졌다가 얼마 뒤 지금까지 살고 있는 포이동 200-1번지에 오게 됐다. 포이동은 당시 강남구가 생기기 전이라 성동구였고 깡그리 논밭이었다. 강제 이주된 자활대원들은 사람이 살 수 있도록 꼬박 6개월간 터를 닦고 판잣집을 세웠다. 녹물이 나오고, 전기는 없었지만 어설프게나마 완성하고 나서 다시 폐품을 찾아 나설 수 있었다.

이후 또다시 외출이 금지된 일이 두 차례 있었는데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이 열리던 때였다. 해외에서 들여와 자랑스레 풀어놓았던, 덕분에 지금은 과도한 개체수로 사람들에게 미움 받는 천덕꾸러기 신세가 된, 비둘기가 자유롭게 날고 있는 동안 그들은 안에 갇혀있었다.

“암만 이름이 바뀌어봤자 우릴 온전하게 보겠어요? 똑같은 생활인데. ‘저 양아치들’ 이렇게 천대시하고. 온전하게 볼 리가 없죠.”

강제로 살게 할 땐 언제고, 첫 목소리

1988년 포이동 자활근로대는 해체됐다. 주민들은 감시와 억압으로 둘러싸인 삶에 한 가닥 자유의 빛이 비춘 줄 알았다. 지도관은 ‘너희들은 자유다’ 라는 말만 남기고 홀연히 떠났다. 저축통장 하나 돌려받지 못했지만 우습게도 인생에서 주어진 첫 번째 자유로 소박한 기쁨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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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화재 전, 주거권을 지키기 위해 싸우시던 모습_사진:박김형준]  

그러나 실제로 그들은 쫓겨난 처지였다. 1988년 12월 마을의 주소 지번이 200-1번지에서 266번지로 바뀌었고 강남구청은 주민들의 전입신고를 받아주지 않았다. 일 년 뒤 가구마다 토지변상금 3·40만원을 부과한 통지서가 날아왔다. 땅값이나 세금이라 생각하고 내면 된다는 왕초의 말에 주민들은 어렵사리 돈을 마련해서 지불했다. 이듬해 날아온 통지서엔 10배가 뛴 액수가 적혀있었다. 무언가 잘못됐음을 느끼고 구청에 찾아가봤지만 소용없었다. 월급과 차량 등 재산을 가압류 당했고 변상금은 매년 쌓여갔다. 지번 변경, 전입신고 거부 등이 자신들을 내쫓으려는 의도였음을 안 주민들은 오랜 억압에 두려움으로 닫혀 있던 입을 열고 처음으로 자신의 권리를 요구했다. 목소리를 멈추지 않으며 지난히 투쟁한 끝에 유도관 씨를 포함한 포이동 주민들은 2009년 실거주지인 개포4동 1266번지로 주민등록 등재됐다.

“주민등록 등재로 나도 이제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 인정받았다는 성취감을 느꼈습니다. 나뿐만이 아니라 주민 모두 그런 기쁨을 느꼈을 겁니다.”

토지변상금은 지금도 나온다. 더 이상 강제로 싣고 가지도, 군홧발로 차지 않지만. ‘몇 cm이상, 유단자 우대’ 용역을 고용해 위협하고, 감시하고 욕한다. 편안한 꼴은 두고 볼 수 없다는 듯이. 그럼에도 버티며 얻어낸 것이 주민등록등재다. 유도관 씨는 꿈 하나를 이뤘지만 아직 하나가 남아있다. 꿈이 없던 아이는 할아버지가 되어 뒤늦은 꿈을 꾼다. 그 꿈은 저 멀리서 희미하게 빛나고 있다.

“앞으로 우리가 여기서 마을 사람들끼리 살 수 있는 길이 있다고 하면 그거 보다 더 좋은 게 어디 있겠어요. 그게 꿈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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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본 인터뷰는 2015년 12월 18일 故유도관 님과 함께 진행되었습니다. 강은정, 배용진, 김재의 님이 인터뷰 녹취 및 녹취록 정리, 배용진 님이 기사 작성을 맡아 주셨습니다. 그리고 포이동 재건마을의 주거권을 지키기 위해 그동안 싸워오신 故유도관 님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겨 보내주신 작가 박김형준님께 고마움을 전합니다. 

img_20151218_205047[2015년 12월 18일 故유도관 님과의 포이동 사람책 인터뷰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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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이동사람책②_故유도관 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