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지부 비누방울 자원활동가 김재근 /
금남로에 갔다. 서울 시내와 크게 다를 것 없는 풍경이 눈 앞에 펼쳐졌다. 광화문광장의 세종대로쯤을 상상했던 나에게 금남로는 예상했던 것보다 좁은 느낌이었다. 이것보다는 장대한 스케일을 생각했었다. 거리에는 버스정류장이 있고 시민들이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가게들은 줄지어서 문을 열고 있었고 그 안의 상인들도 보였다. 다정해 보이는 연인들이 교차로에 서있기도 했다. 신호에 맞춰 거리를 횡단하며 각자의 갈 길로 순탄하게 흘러가는 자동차와 시민들의 모습은 때맞춘 쾌청한 하늘과 맞닥뜨려 한산한 오후의 시내가 내뿜는 특유의 평화로움을 연출하고 있었다. 그 어디를 둘러보더라도 그 날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내가 상상하는 그 날의 총성, 그 날의 핏자국은 지금 서있는 공간과 아무런 개연성도 없어 보였다. 이것이 당연하다 싶었지만 한편으론 가슴에 품고 온 비장하고 처절한 광주의 이미지가 계속해서 눈 앞의 풍경을 낯설게 만들었다. 내가 찾던 35년 전의 광주는 이 곳에 없는 듯 했다.
그러다가 느닷없이 상상이 되었다. 갑자기 뛰어들어오는 상처입은 군중들, 그 뒤를 좆는 군인들, 미친듯이 휘몰아치는 무수한 곤봉질, 벙쪄서 바라만 보고 있는 시민들, 혹은 분개하여 뛰쳐나가는 시민들, 혹은 황망한 눈물을 쏟아내는 시민들의 모습이 상상되었다. 그러한 풍경들이 지금 바라보고 있는 평화로운 금남로의 풍경 속으로 난입해 들어왔다. 쫓고 쫓기는 군인과 학생들의 모습이 평화로운 풍경을 산산히 깨뜨리고 있었다. 그리고 이 두 풍경은 끔찍하리만치 서로 잘 어울렸다. 시민들의 평화로운 일상이 한순간에 처참히 깨지는 모습이 눈 앞에 생생했다. 쓰러진 사람들, 계엄철폐를 외치는 사람들, 도망가는 사람들이 연이어 눈에 들어왔다. 한번 깨어지기 시작한 풍경은 무서운 기세로 깨져나갔다. 아까의 안정감과 단조로움은 없어졌다. 일상과 비일상 사이의 날카로운 긴장이 느껴졌다. 결국 금남로는 35년 전 그대로였던 것이다. 그 날도 지금과 같이 도저히 깨질 것 같지 않은 안전한 하루였을 것이고 총과 피는 당시의 풍경과 어떠한 개연성도 가지지 않은 듯 보였을 것이다.
저녁 8시에 서울로 돌아왔다. 버스에서 내려서 다시 서울에 첫 발을 내딛었을 때 들었던 생각은 이 곳도 역시 광주라는 것이었다. 광주를 다녀오기 전과는 다른 서울이 되어 있었다. 익숙한 가게의 간판, 익숙한 가로등 불빛, 익숙한 골목들은 또 다시 나에게 평소와 같은 익숙한 편안함을 안겨줬지만 그 편안함 속에는 무수한 균열의 가능성이 내포되어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절대로 깨어지지 않을 풍경이란 인상이 너무나도 강하지만 이제는 그것이 사실이 아님을 안다. 이 풍경은 결코 절대적으로 안전한 것이 아니고 언제든 깨어질 수 있는 것임을 온 몸으로 느낀다. 지금 딛고 선 아스팔트 바닥이 유리처럼 깨어질 수 있다는 것, 지금의 풍경이 정말로 아슬아슬한 긴장 속에 놓여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 것은 광주의 땅을 밟아봤기 때문에 가능했다. 올 해 광주를 다녀오지 않았다면 나에게 광주는 전라남도 어느 곳으로서의 지역적 한계를 뛰어넘지 못했을 것이다.
80년 그 날의 광주는 내가 있는 모든 곳을 광주로 바꾸어버렸다.
이제 그 어디에서나 광주를 느낀다.
<2015 광주역사기행 활동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