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이동재건마을주민구술기록자원활동 <포이동 사람책>]
사단법인 평화캠프 서울지부에서는 2015년 하반기 포이동 재건마을(현 개포동 1266번지) 주민 인터뷰 자원활동, <포이동 사람책 프로젝트>를 진행하였습니다. 주민들의 이야기를 듣고 마을의 역사와 주민들의 개인사를 엮어내는 것이 이 프로젝트의 목표였습니다. 그간 진행된 주민들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포이동 사람들>을 연재하고자 합니다. 이 기획물이 포이동 재건마을에 대한 여론을 환기하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세 번째 이야기, 김미선님
어느덧 니트와 코트를 옷장에서 고를 때쯤, 우리 포이동 사람책 프로젝트의 자원활동가들도 이곳 포이동 266번지에 들락날락 한지도 한 달이 지나가고 있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2층 문을 열었을 때 우리를 반겨주는 따듯한 포이동 주민분들의 목소리가 차가웠던 몸을 녹이게끔 해주었다.
오늘은 김미선 씨의 인터뷰가 있는 날이다.
포이동에서의 시작
포이동 266번지에서 살아온 지 올해로 25년째가 되는 김미선 씨는 90년 12월에 포이동으로 들어왔다. 남편이 직장 때문에 밖에 같이 나가서 살다가 그때 같이 들어오면서 시어머님과 함께 이곳 포이동에서 정착하게 되었다.
“친정은 강화도에서도 배를 더 타고 들어가면 교동이라는 곳이 있는데 그곳에서 자라다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옷 만드는 공장에서 미싱 업무 보조를 맡았었는데 그곳에서 재단사 남편을 만났어요”
김미선 씨는 큰아이 초등학교 시절부터 방과 후 수업에 참여하면서 종이접기와 같은 활동에 많이 참여했다고 했다. 새삼 그동안의 손재주가 좋으셨던 이유를 알게 됐다.
“집에서도 가끔 취미로 지점토를 만들어서 꾸미거나 인형을 손수 만들어보고…… 판매할 정도는 아니지만 배우지 않고 누군가 하는 걸 보고 혼자서 집에서 하고는 했어요”
김미선 씨에게는 27살, 26살, 중학교 2학년의 늦둥이 막내까지 세 명의 자녀가 있다. 힘든 형편에 세 자녀를 키우는 것이 힘들지는 않았냐는 질문에 표정이 어두워졌다.
“여기로 온 뒤로는 남편이 재활용품을 주어 다 팔았었는데 수입이 넉넉지가 않았어요. 그래서 애들 학원 같은 곳을 보내지 못하고 어떻게 해서 겨우 어린이집 정도는 보냈었는데 학원을 못 보냈던 게 제일 힘들었어요. 살림이 넉넉하지 않아서 자식들 학원을 보내주지 못했던 게 가장 미안하고 힘들었어요.”
그녀는 90년대 포이동의 첫 모습을 이렇게 기억했을까? “당시에 가건물 그러니까 판잣집으로 지어놨었기에 서울에도 이런 곳이 있었구나… 이런 곳에서 어떻게 살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고 한다. 당시 TV로만 보던 아파트와 단독주택의 화려한 서울의 모습은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없는 포이동에서의 나날들이 그렇게 시작됐다.
“처음에는 막막하게 와서 살았지만 살다 보니까 어울려서 지내는 것이 점차 즐거워졌어요. 그런데 아이들이 하나, 둘, 셋 생기다 보니까… 애들이 초등학교를 5분 거리에서 다녔는데 방과 후 한 시간이 지나야 돌아오곤 했어요. 여기 산다는 거 알게 되면 놀리니까… 큰 애는 사내라서 덜 했는데 둘째는 여자애라서 예민했어요. 여기서 지내온 아이들은 다 겪었던 일이겠지만 아이들 입에서 이사 가고 싶다고, 언제쯤 이사 갈 수 있냐 라는 말이 나올 때 가장 속상했어요…”
90년대 포이동의 열악함과 분위기
당시 말이 좋아서 판자촌이지 상황은 더욱 열악했다고 한다.
“마을 전체에 76가구가 살았었는데 개개인 집마다 화장실이 있던 게 아니라 공동 화장실을 사용했어요. 그것도 재래식이었고 마을에 수도시설이 안 들어와서 지하수를 퍼 올려서 사용했는데 녹물에다가 흙이 나오는 상황이었어요.“
“여름이건 겨울이건 손빨래를 했야 했는데 기저귀 같은 것들을 빨려고 하면 노래지고 흙이 묻고 그랬어요… 물은 안 끓이면 먹지도 못하는 정도였고 그마저도 넉넉히 나오지도 않았어요. 그리고 포이동 자체가 지대가 낮아서 비가 많이 오면 아래쪽에 스무 채 정도는 물이 차고 그랬는데 한두 번이 아니라서 장롱 같은 것들은 벽돌 위에 두고 쓰고 심할 때는 무릎까지 물이 차고 그랬어요.”
그 외에도 마을을 관리하던 횡포가 심했던 왕초가 불법으로 링거, 주삿바늘, 병원에서 쓰던 자재들이나 병 같은 폐기물들을 사업하면서 마을에 쌓아두고 버려놔서 어르신들이 걸어 다니기 힘들 정도였고 힘든 점을 얘기하면 끝이 없을 정도로 할 얘기가 많았다.
김미선 씨는 들어온 다음 해부터 매달 십만 원에 달하는 토지변상금을 부과받았다고 한다. 그 당시는 그것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했고 마을의 왕초라고 불리는 자가 내라고 했기에, 적은 돈은 아니었지만 시어머니가 변상금을 지불하였다고 한다. 그 후로는 이것을 내면 왠지 불법 점유자라는 것을 인정하는 꼴이 되는 것 같아 내지 않으셨고 지금은 이자가 붙어 몇천만 원에 이르는 고지서가 포이동 주민들에게 계속 부과되고 있다.
“제가 처음에는 시어머님도 계시고 제가 나이가 어린 편이었기 때문에 집회나 시위에도 시어머님이 참석하셨어요. 그래서 마을 돌아가는 상황은 잘 몰랐었거든요. 그러다가 2004년부터 회의에 참석하고 투쟁을 시작하면서 이 심각성을 알게 되었죠. 그 뒤로는 집회도 참여하고 했는데 처음에는 진짜 창피하고 아는 사람이 지나가다가 볼까 봐 거의 숨다시피 하면서 했던 것 같아요. 강남구청 앞에서 시위가 많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근처 학부모들이 볼까봐… 애들도 학교를 다니던 상황인지라 걱정이 앞섰죠”
용역깡패
포이동을 철거하려고 용역들도 동원되지 않았냐는 질문에 미선 씨는 ‘두려웠죠’라며 첫마디를 이어갔다.
“솔직히 여기 와서부터는 동사무소나 관공서 갈 때도 죄지은 것도 없는데 괜히 떨리고 그랬어요… 주소 같은 것들이 말소될까 봐 걱정도 되고 했었죠… 처음 용역들을 봤을 때는 포이동 공용주차장 쪽으로 해서 쳐들어 왔었는데 방패들을 들고 있어서 경찰인 줄 알았어요. 그 방패들을 가지고 밀고 들어오니까 주민들이 못 들어오게 막으려다가 많이들 다치셨죠.“
“심한 경우에는 할머니 한 분은 손을 다치셨는데 신경을 다쳐서 한여름에도 장갑을 끼고 다니세요. 손이 시리셔서… 그때 주민들 진짜 남녀를 가리지 않고 엄청 맞았어요. 캠코더를 가지고 있었는데 느닷없이 날라와서 캠코더도 완전히 박살내고 제 옆에 있던 아저씨가 저를 막아줬는데 그 아저씨 키도 크고 덩치도 있으신데 그날 얼마나 맞으셨는지… 용역들은 적게는 50명 많이 올 때는 200명씩 오는데 그럴 때마다 얼마나 무서운지 몰라요.“
김미선 씨는 2011년 9월 25일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용역들이 들어와 집을 부수고 마을을 뒤엎어버렸던 그 날이기 때문에 잊을 수가 없다고 한다.
옆에 있던 포이동 주민들과 10년 넘게 함께 해온 코디네이터 신지혜 씨는 용역경비업체들을 불법적으로 이용해 모집할 때부터 키와 체격, 나이에 제한을 두고 유단자들을 모집하며 파이프와 해머들을 가지고 주민분들에게 위협과 폭력을 가하는 것도 모자라 용역업체들이 출동하기 전에 경찰에게 미리 고지하고 동행하는 것이 원칙이나 연락을 하고 왔음에도 주민분들을 때리고 집을 부수는 동안 경찰은 모르쇠 하는 태도, 주민분들을 보호하지 않는 철거 현장과 강남구청의 악랄함을 호소했다.
2011년 6월 12일 포이동 화재사건
포이동에서 살면서 가장 큰 사건이라고 말할 것이 있냐고 물었더니 주저 없이 11년 6월 12일에 있었던 포이동 화재사건이라고 말했다. 애초에 다닥다닥 붙어 있을 수밖에 없는 구조의 판자촌은 불에 타기 쉬운 자재 때문에 화재가 발생하면 큰 피해로 번질 것이 분명했었다. 화재는 삽시간에 마을 전체로 번졌었고 소방차들은 뒤늦게 도착했지만, 화재진압을 바로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것으로 인해 주민들은 강남구청과 거래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의구심을 가지게 되었다.
결국 마을대부분의 가구들과 재산이 불에 타 사라졌고 인명피해가 없다는 것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그 시기를 기회삼아 강남구청에서는 용역들을 이용하여 상시 드나들게 하면서 완벽한 철거로 마무리 지으려고 했었기에 주민들은 돌아가면서 순찰을 하고 10시 이후에는 집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였다고 한다.
“화재가 나고 나서 물질적이나 심적으로 다 힘들었죠… 그전에는 그래도 집이라도 있었지… 집도 다 타버리고 돈을 모아둔 것이 있길 하나 살림도 넉넉하지 못한데 하나도 건지지 못하고 다 타버렸으니 그 당시가 가장 많이 힘들었어요.”
김미선 씨의 눈가가 붉어졌다. “화재가 나고 강남구청에서 막 임대를 가라고 압박했을 때 이제 힘드니까 큰 애가 생전 그런 소리를 안 하던 앤데… 임대를 가자고… 엄마 아빠도 힘드니까 임대가서 살자는 소리를 하더라고요.” (그래서 뭐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조금만 더… 버텨보자고…”
본인은 사는 데 큰 불편함을 못 느꼈지만, 자식들이 힘들었던 점을 생각하면 미선 씨는 눈물이 난다고 말했다. 당시에 찻째는 공익근무 중이었고 화재 이후에는 수원 고모 집에서 출퇴근을 했고 둘째도 실습을 나갔어야 했는데 힘들어서 어쩔 수 없이 휴학도 하고 선생님들이랑 상담도 자주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 당시 상황들이 열악하고 힘들어서 주민 공동 대표분들이나 2조 조장님이 예전에 사용하던 화재 안 난 공부방에 물품들을 보관하고 있었는데 거기 방 하나를 싹 비워서 당장은 힘들겠지만 일단은 자식들하고 같이 지내라고 배려해주어서 애들과 같이 지낼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화재 이후로 집이 지어진 지 얼마 되지도 않았을 때 용역들에 의해서 집이 부서졌다고 하니 상심이 컸을 것이다.
김미선 씨의 바람
그렇게 힘들게 살아온 그녀가 자식들에게 바라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큰 애들은 다 컸으니까 직장 잘 다니고 건강하고 사고 없이 잘했으면 좋겠고 막내는 말썽 안 부리고 잘 컸으면 좋겠어요. 저도 그렇고 애들도 그렇고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거든요… 부모가 못 받쳐주지도 못하고 학교를 좋은 곳에 보내주지도 못해서 밥벌이는 지금 하고 있지만 지금보다 더 잘 살 수도 있고 못 살 수도 있겠지만, 자기네들이 받은 만큼은 못하더라도 남을 배려하고 살면 좋겠어요…”
그녀의 말에는 진심이 담겨있었다. 마지막으로 그녀가 꿈꾸는 앞으로의 포이동은 어떤 모습일지가 궁금했다.
“저희는… 제가 바라는 거라면 그냥 지금처럼 이렇게 살았으면 좋겠어요. 더 좋아지는 것도 싫고 이렇게 살 수 있다면 그냥 이대로 살았으면 좋겠어요. 그냥 더 새로운 집이나 지원이 없더라도 구청에서 압박 안 받고 이 상태로 살 수 있게 해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죠. 좋은 집도 필요 없고 30년 넘게 다들 함께 해왔던 곳이기에 지금 사는 대로.”
포이동에 첫발을 디디던 날 그날따라 유난히 바람이 차고 비가 내렸다. 마을의 입구는 좁았고 골목을 지나가는 동안 한 명도 마주치지 못했다. 그날의 추위 때문이었을까? 주민들의 외로운 투쟁 때문이었을까? 왠지 ‘차가울 것 같다.’라 생각했던 주민들은 따듯한 분들이었고, 그 마지막 남아있는 따듯함을 지키기 위해 오늘도 끝이 보이지 않는 싸움을, 차디찬 아스팔트 바닥 위에서의 시위 아닌 시위를 하고 있었다.
- 2015년 11월 15일 인터뷰는 마을주민 김미선 님과 함께 진행되었습니다. 이제현, 박진명, 이의지 님이 인터뷰 녹취 및 녹취록 정리, 이제현 님이 기사 작성을 맡아 주셨습니다.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