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토리 인연맺기학교 자원활동가 이아윤
수민쌤과 나는 죽이 잘 맞는다. 3주차 활동을 위해 낙산공원을 답사 하는 중, 원데이 클래스 보고 광영이랑 제빵을 해보고 싶다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 후 찾아 본 원데이 클래스는 너어무 비싸서 세 명 모두 활동을 하려면 예산을 10만원쯤으로 잡아야 했다. 아니면 케이크 시트에 생크림 바르고 꾸미는, 발품 팔면 2만원 안으로 준비할 수 있는 일을 몇 만원씩 더 얹어줘야 했다. 그래서! 전자레인지로 만들 수 있는 초코 케익 믹스로 시트를 만들고, 50g에 700원 하는 제과점 생크림 대신 직접 체 쳐서 사용하기로 했다.
준비할 게 많다 보니 4주차 활동은 동대문 역사문화공원 투어를 하고, 5주차에 케익을 만들기로 계획했다. 그런데 동역사 답사 날. 월요일이 휴관일 인걸 까먹어 굳게 닫힌 문 앞에서 망연자실했다. 급하게 다른 장소를 찾아봤지만 도저히 활동을 할만한 장소가 생각이 나지 않아 4주차 프로그램을 케이크 만들기로 하고, 수민쌤이 사주신 아이스크림을 배터지게 먹으며 장소 대관과 프로그램 계획을 한번에 해결했다.
케이크 꾸미기를 할 수 있도록 전자 렌지와 싱크대가 있는 곳이 필요해서 가격이 일반 스터디 룸보다 비쌌는데, 전화 예약을 맡아주신 수민쌤의 협상능력으로 정말 좋은 장소를 싼 가격에 얻을 수 있었다.
주요 프로그램은
- 케이크 만들고 꾸미기 + 달고나 만들기
- 고구려 장수왕때부터 유행한 전통놀이 젠가 하기 + 벌칙 주사위
- 오목, 알까기 로 정했다.
예전에 같은 케익 믹스로 여러 번 케이크를 만들고 꾸며본 적이 있어 크게 걱정 되진 않았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일이 꼭 한 번쯤은 일어나야 도토리 아닌가. 활동 중간 불상사 생겨도 수습할 수 있게 온갖 블로그에서 다른 사람들이 만든 케익 후기를 보고 갔다. 더불어 다양한 케.꾸를 보며 광영이와 아주 멋들어진 결과물을 만들겠다는 열의도 샘솟았다.
그런데. 예상치도 못한 난관이 활동 시작 전에 찾아왔다.
1시간 동안 수유 근방의 마트를 뒤졌지만 초코 케익 믹스를 파는 곳이 없었다! 당황했다. 우리 동네 마트(대형마트X)에서도 팔길래 당연히 수유 마트에서도 팔 줄 알았다. 택시를 타고 대형마트로 가서 믹스를 사오느냐, 아니면 다른 활동을 하느냐의 갈림길에서 초코 케익을 포기하고 팬케이크를 선택했다. 잠시 자랑을 하자면 나는 팬케이크 굽는 걸 실패한 적이 없는 팬케이크의 왕 팬케이크 장인 팬케이크 마스터다. 그러니 활동의 메인 재료가 바뀌었어도 괜찮았다.
다만 걱정이었던 게, 맛있는 팬케이크를 만들기 위한 팬케이크 마스터의 지론은 “기다림”이다. 두툼한 팬케이크를 약한 불에서 시간을 들여서 한장 한장 구운 다음 요거트와 메이플 시럽을 둠뿍 부어 먹는게 묘미인데. 한 장 굽는데 5분 이상이 소요되는 활동을 광영이가 좋아할지 걱정됐다.
초코 케익 믹스는 렌지 4분컷+ 냉장고에 넣어 식히는 동안 보드게임 활동을 한 뒤, 약 1시간 후 케이크가 식으면 생크림을 바르고 꾸미는 계획을 짤 수 있지만 팬케이크는 3인분을 세월아 네월아 불 앞에서 굽고 있어야 하는게 맘에 걸렸다. 급하게 팬.꾸(팬케이크 꾸미기)를 알아보니 굽는 차이로 그림을 그리는 활동이 가능하다는 걸 발견하고, 굽는 과정에서도 광영이가 재미있게 참여할 수 있도록(할 수 있길 바라며) 주둥이가 가는 소스 통을 급히 사왔다.
이런저런 걱정이 가득한 채로 재료 준비부터 차근차근 시작했다. 팬케이크 만들기는 공정이 간단하다.
- 거품기로 계란과 설탕을 섞는다
- (1)에 우유를 넣고 섞는다
- (2)에 팬케이크 가루를 체 쳐서 넣고 섞는다
- 굽는다.
이 중 1부터 3까지는 광영이와 함께 할 수 있었다. 내가 설명 하면 수민쌤과 광영이가 나란히 앉아 위의 공정을 했다. 광영이는 베이킹 경험이 있는 것 같다. 수민쌤의 설명을 따라 곧잘 따라했고, 팬케이크 가루를 왜 체에 쳐야 하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익숙한 일이라 그런지 굉장히 열성적으로! 거품기를 사용해 섞었다.
10분도 안돼서 위의 공정이 끝나 팬케이크를 구으러 갔다. 팬케이크 그림의 시범을 보여줄 때 광영이가 호랑이를 그려달라고 했다. 자신 있는 척 했지만 넘 어설프게 그려서 민망했다. 광영이도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핀잔을 줬다.
설상가상 얼마나 구워 야지 진하게 그림 테두리가 나오는지 감을 잡지 못해 그림이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 내가 인덕션 앞에 서서 팬케이크를 노려보는 동안 수민쌤은 생크림을 쳤다. 사실, 케이크를 준비할 때 가장 걱정했던 게 생크림 치기였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30분동안 팔 빠지게 쳤다, 사 먹어라, 기계를 써라 등등 중노동을 거쳐야지 크림이 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광영이와 내가 돌아가며 조금씩 깔짝댔지만 99%를 수민쌤이 팔 떨어지게 쳤다. 내가 마지막 1%에서 숟가락 얹어 스퍼트를 올리니 진짜로 액체가 크림이 됐다. 질감과 단단함은 시판 생크림과 당연히 다를 수밖에 없었지만, 그 누구가 봐도. 우주정거장에서 봐도. 생크림 이었다. 처음 젓기 시작했을 때는 한강에 돌을 던지는 심정이었는데 진짜로 크림이 돼서 무척 기분이 좋았다. 오늘을 위해서 주 5일을 운동 했나 보다.
팬케익과 생크림을 만드는 동안 마음에 걸렸던 게, 나는 인덕션 앞에서 팬케이크가 잘 익을까 안절부절 못하고있고, 수민쌤은 집중해서 생크림을 치고 계시는 동안 광영이가 방치된다는 느낌을 받으면 어쩌나 걱정했다. 젠가 벌칙에 쓸 종이 주사위를 잘라 달라 부탁하긴 했지만, 우리가 하는 활동은 “서로” 재미있는 시간을 만드는 거지, 완벽하게 구워진 팬케이크를 만드는게 아니지 않나.
나는 잘하는게 별로 없어서 능력을 보일만한 상황이 생기면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될 정도의 의욕을 불태우다 활동의 핵심을 잊는 것 같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팬케이크 경연대회 나간 사람마냥 프라이팬을 째려보고 있던 건 적절치 못했던 것 같다.
그렇게 잘 해보려 했는데 첫 호랑이 팬케이크가 망했다. 광영이의 실망감을 숨기지 못하는 얼굴이 눈에 선하다. 생크림을 친 후로는 수민쌤이 팬케이크를 구워 주셨다. 평소 집에서 전을 많이 부쳐 보셨다고 했는데, 수민쌤의 팬케잌은 정말 넙떡하고 얇은 밀풰유 같았다. 팬마지(팬케이크마스터의지론)는 ‘팬케이크는 두꺼울수록 좋다’ 였지만, 수민쌤 처럼 얇은 팬케이크도 나름의 맛이 있어 팬마지를 스리슬쩍 내려놨다. 다음엔 광영이랑 밀풰유 케이크를 만들어도 좋을 것 같다! 그럼 사이사이 크림이나 잼을 바르고 쌓기 등 광영이도 참여할 수 있는 공정이 늘어나지 않을까?
이러저러 우당탕 팬케이크였지만 광영이는 맛있게 먹었다. 진짜 잘 먹어서 너무너무 기뻤다.수민쌤의 완벽한 당도의 생크림, 우리 할머니가 만드신 딸기잼, 스프링클 가루, 블루베리를 얹어 팬케이크를 장식하니 “그럴싸”한 꾸밈이 아닌, 정말로 멋진 팬케이크 모듬이 만들어졌다.
패션 푸르츠와 탄산수를 곁들여 다 같이 냠냠냠 먹고 젠가를 했다. 앞서 광영이가 자른 젠가 벌칙 주사위에 적을 벌칙을 두 개씩 정했다. 젠가를 무너트린 사람이 주사위에 적힌 벌칙을 수행한다.
수민쌤은 활짝 웃고 사진 찍기, 노래 한 소절 부르기, 광영이는 SG워너비의 살다가 부르기, 동물 머리띠 쓰고 활동하기,나는 동물 머리띠 쓰고 사진 찍기, …랑 뭐였더라… 까먹었다.
젠가를 할 때처럼 신난 광영이는 처음 봤다! 이때까지 한 활동 중에서 가장 즐거워 보였다. 수민쌤 한테 장난을 치고 젠가를 톡톡 두드리고, 적극적으로 얘기를 하면서 입가에 웃음이 내내 걸려있었다. 서로 힌트를 주고받으면서 행위예술 같은 젠가를 하니 시간이 정말 빠르게 지나갔다.
야속하게 지난 시간을 아쉬워하며 파티룸 청소 보증금을 돌려받기 위해 남은 시간 동안 빠르게 뒷정리를 했다. 수민쌤이 주로 설거지를 해주셨는데, 유지방 100%의 생크림 설거지를 하시느라 정말 고생하셨다. 수민쌤이 물일을 하시니 나라도 광영이에게 함께 사용한 공간을 같이 정리하자고 했어야 했는데, 시간이 촉박하다는 생각(착각)에 차근차근 설명하지도 못했고, 자잘한 분리 수거와 평캠에 가져가야 할 용품, 그리고 개인 용품을 광영이 에게 나누어 설명하기가 힘들어 혼자서 이것저것 정리했다. 광영이는 멀뚱멀뚱 서 있고 우리 둘만 후다닥 청소하는 모양새였다.
나는 활동참여자와 3시간 내내 찰싹 달라붙어 한시도 떨어져있으면 안된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필요한 일이 있다면 선생님은 해야할 일을 하고, 활동참여자는 조금 기다릴 수도 있다. 하지만 팬케이크를 구울 때와 청소를 할 때에는 ‘해야할 일에 치여서 광영이를 소홀히 한 게 아닌가’ 라는 고민이 들었다. 소수 활동에 걱정이나 불편함을 가진 적이 없었는데 오늘 처음으로 선생님이 적은 게 아쉬웠다.
분주하게 움직이니 청소가 금방 끝나 인덕션에 쫀드기를 구워 먹었다. 광영이는 처음 먹어보는 쫀드기가 꽤 맛이 있었는지 남은 걸 가져가겠다고 했었다. (하지만 마지막에 마음이 바뀌어 가져가지 않았다) 맛있는 쫀드기를 먹은 대가로. 인덕션이 조금 더러워졌다.. 우리 집 인덕션이랑 달랐다. 이것 때문에 보증금을 환급 받지 못하면 어쩌나 노심초사했는데 다행히 잘 돌려받았다.
활동 시작 전, 나는 준비물을 추가로 사기 위해 다이소에 들러 늦게 도착했고, 수민쌤은 파티룸 호스트에게 청소를 마치고 체크아웃 했다고 연락하기 위해 늦게 출발하셨다. 내가 늦게 왔을 땐 광영이가 나를 찾았고, 수민쌤이 늦게 출발 했을 때는 뒤에서 수민쌤이 언제 오실까 계속 돌아보며 신경 썼다. 광영이도 우리한테 정이 든 거겠지..?? 너무 뿌듯하다.
활동을 마무리하며 드는 생각을 정리해 보자면,
- 활동에 필수적인 용품은 당일 구매하지 말고 하루 이틀 전에 준비하자.
- 활동참여자가 적극적으로 함께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준비하자.
- 프로그램의 제한 시간에 맞출 수 있는 활동을 준비하자.
이번 활동에서 계획한 건 정말 많았다. 오목, 알까기, 달고나 만들기를 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달고나 재료는 꺼내지도 못했고, 젠가도 마음껏 하지 못했다. 스페어 프로그램이 많으면 좋긴 하지만 재료+장비를 챙겨 오는게 힘드니 다음에는 진짜로 할 수 있을 활동을 추려 정도껏 계획 해야겠다.
합동 졸업식을 할 수 있으면 정말 좋겠다. 소규모로 팀이 뭉쳐 나들이를 가고 싶기도 하다. 곧 도토리 활동이 끝이라는 게 믿기지 않는다. 광영이와 수민쌤과 하고 싶은 일이 산더미처럼 많은데 왜 이렇게 시간이 빠른지 아쉬울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