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캠프 서울지부 2015 인연썸머 참가 후기]

 

인연썸머, 우린의 다이어리

 

/ 김우린 평화캠프 서울지부 자원활동가

 

설레임과 두려움 사이에서

대단한 포부를 가지고 인연썸머를 가기로 결심한 건 아니었는데, 교육을 받다보니까 걱정이 많아졌었다. 우선 3박 4일 동안 낯선 사람들과 어울려   지내는 것도 큰일이고, 발달장애를 가진 아이들을 처음 만나고, 여러모로 굉장히 낯설겠다는 생각에 불안했다. 그래서 인연썸머를 떠나기 전 주에 조금이라도 익숙해질까 싶어 준비를 도왔다. 뭘 준비할까 싶었는데, 빨대피리 만들기와 색연필 챙기기 같은 것들을 함께 준비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마음이 놓였다. 작은 위안이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나도 모르게 늘 돌발 상황에 대해 시뮬레이션을 해보고 있는 나의 모습에 발견하며 깜짝 놀라기도 했다. 아이들의 안전에 대해 비장한 마음을 가져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냥 아이들과 놀 준비를 열심히 해서인지 조금 안심도 되고 이렇게 들쭉날쭉 설레임과 두려움 사이를 미묘하게 오가는 나의 모습에 약간 갸우뚱하기도 했다.

2015인연썸머 참가 김우린 자원활동가

 

7월 31일. 스탭 선생님이 되다.

7월 31일 아침에, 그나마 맡은 역할이 스탭 선생님으로 가는 동안 잘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며 차에 탔다. 예상보다 빠르게 도착해 짐을 옮겼다. 아직도 무거운 수박들 생각만하면 팔이 떨려온다. 초등학교 방학 때마다 캠프를 자주 다녔었는데, 어릴 땐 준비하는 데 이렇게 많은 손이 필요하다는 걸 몰랐다. 이젠 내가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게 뭔가 모르게 재밌었다. 무언가 뒤에서 도와주는 걸 좋아하는 터라 준비는 익숙했다. 물론 사람들과 어색했지만, 이미 알고 지내던 사람들도 있었고 이미 세상을 바꾸는 자원활동에 대한 여러 생각들에 대해 공통점들을 공유하며 떠나고 있는 모습들에서 좀 더 친밀감 같은 것이 생겨났다. 인연썸머가 지나고 되돌아 하루하루를 곱씹어 돌아보니 스탭 선생님들이 먼저 가있던 7월 31일의 시간이 제일 느리게 간 것 같다. 아이들과 함께 있을 때는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모르게 하루가 빨랐다.

 

8월 1일. 드디어 만난 아이들.

다음날에 아이들이 왔다. 떨렸다. 내가 은연중에 상상하고 있던 아이들과 달랐다. 오래 차를 타고 와서 지쳤는지 생각보다 조용했다. 떨리는 마음으로 응원도구를 가지고 인사하러 내려갔다. 같이 있던 쌤들이 왠지 벅차다고 한 게 생각난다. 그때는 벌써? 이런 생각이 들었는데, 지금 그 장면을 생각해보니까 비슷한 느낌이다. 아이들과 입소식을 하고, 늦게 왔던 관악구청에서 출발한 차에 탄 아이들을 맞이하고, 밥을 먹고, 실내운동회를 했다. 하루가 굉장히 빨랐다. 처음 만나는 거라 서툴렀고, 아이들과 만나는데 특별한 건 없었다. 가기 전에 가졌던 편견들. 이를 테면 ‘비장한 마음을 가져야 하는 건 아닐까’ 했던 마음이 우습게 느껴졌다. 나는 아이들이 죄다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니고 소리를 지를 줄 알았다. 그런데 가보니, 그런 아이가 없었던 건 아니지만 모두가 같은 모습일 거라 예상했던 내 생각에 조금 부끄럽기까지 했다. 대부분은 사회자가 앉으라고 하면 잘 앉아 있었고, 호응도도 꽤나 높았다. 그저 여느 아이들처럼 천차만별 각자의 개성을 그대로 간직한 똑같은 또래 아이들이었다. 비장애 아이들과 만나서 놀았어도 아마 별반 다르지 않았음에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물론 창문은 깨지지 않았을 수도 있었겠지만, 아마 비슷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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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2일. 그저 민성이만 보이던 날.

인연썸머 이튿날에는 많은 프로그램을 했다. 전날 새벽에 불침번도 서고, 진행하는 것도 몇 개나 되어서 걱정했었다. 그래도 꽤 잘 된 것 같아서 다행이었다. 인연썸머 동안 일기를 썼는데, 일기장에는 민성이 이야기가 있다. 인연썸머 1일차에 처음 민성이를 만났을 때 민성이는 컨디션이 조금 안 좋았다. 너무 버스를 오래 타고 오느라 그랬다. 휴게소에서 화가 나서 몇 십분 동안 출발을 못 했다고 한다. 와서도 그리 기분이 좋지 않았고, 짝꿍 쌤들도 힘들어 하셨다. 유스호스텔에 도착해 짝꿍 쌤 두 분이 번갈아서 샤워하러 갔다 오는 동안 잠시 내가 짝꿍 역할을 했었다. 민성이는 엘리베이터를 굉장히 좋아하는 아이였고, 안타깝게도 나와 다른 한 짝꿍 쌤은 엘리베이터보다 덜 흥미로운 존재였다. 민성이는 옷도 갈아입지 않고 계속 엘리베이터를 타려고 했다. 나와 짝꿍 쌤들은 민성이를 계속 방으로 유도했는데 번번이 실패했다. 함동엽 쌤이 지나가면서, “물론 프로그램 참여를 계속 유도해야겠지만, 안 된다면 2박 3일 동안 이러고 있는 것도 나쁘지 않을거다” 고 했다. 당연한 말인 것 같은데, 약간은 충격을 받았다. 아무튼 전날엔 그렇게 얼굴을 찡그리던 민성이가 이튿날 문화제 준비할 때 계속 대강당에 머물렀다. 민성이는 엘리베이터 말고 스피커도 좋아했다. 계속 커, 커 그러면서 웃고 있었다. 춤 연습 리허설을 하는 걸 보고도 너무 즐거워했다. 그 전날엔 그렇게 화를 내놓고, 지금은 너무 즐거워하는 모습에서 왠지 짠한 마음이 든 것도 사실이다. 민성이의 평소 생활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

2일에 한 프로그램은 다들 좋았지만, 그중에서도 문화제는 정말 인상 깊었다. 특히 연극을 할 때, 모두가 심각한 표정으로 연극에 집중하는 것을 보고는 알 수 없는 감동까지 내게 전해왔다. 평소에도 천진난만하게 노는 걸 좋아하는 터라, 율동하고 신난 아이들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던 문화제는 잊지 못할 것 같다.

저녁엔 스탭 평가 회의는 훈훈했다. 익숙해지면서 마음이 다들 편해졌다. 그런데 그 뒤에 일어난 일을 생각하면… 조금만 긴장이 덜 풀렸으면 어땠을까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게 사실이다. 마지막 날 새벽 여섯시 반에, 다들 비몽사몽한 표정으로 충격적인 얘길 듣는데, 휴… 왜들 그랬을까, 큰 잘못이라고 생각을 안 했을까… 잘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 있는 게 사실이다. 마무리가 잘 되어야 할 텐데 큰일이다 싶었다.

 

8월 3일. 나만 아쉬웠나봐.

인연썸머 마지막 날 아침, 프로그램 진행 할 스탭 선생님이 적었다. 아이들하고도 이젠 웬만큼 눈을 마주칠 수 있는데, 아무래도 진행 스탭 선생님이 적어서 무리였다. 그래서 준비한 프로그램 대신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로 대체 했는데 그나마 다행히 아이들이 좋아했고 나름 재미있었다.

떠날 때 아이들이 많이 아쉬워하지 않고 즐겁게 간 것 같아서, 눈물이 나거나 하진 않았다. 실은 전날에 마지막을 생각하면서 눈물이 살짝 고였던 터라, 울면 어떡하지 하는 가벼운 걱정을 했었다. 정작 마지막엔 울지 않다니… 다만 인사를 제대로 못하고 간 게 아쉬웠다. 점심을 먹고 피곤해 상황실에서 쉬고 있었는데, 재근쌤이 올라와서 허겁지겁 짐을 싸는 걸 보고도 아무생각 없이 앉아 있다가, 갑자기 ‘앗, 떠나는구나’ 하고 깨달았다. 인사할 시간이 있을 줄 알았는데 그냥 갔다. 정현쌤과 함께 부랴부랴 1층으로 내려갔을 땐 아쉽게도 신촌으로 향하는 아이들의 차는 떠난 뒤였고, 민성이가 강당으로 들어가려고 버티는 바람에 관악구청으로 향하는 차는 출발을 못 하고 있었다. 인사를 하려는 사람이 나뿐이어서 조금 얼굴이 뜨거워지긴 했지만 미정쌤 손에 끌려 버스 안에 들어가 인사를 했다. 다행이었다.

 

기억 저 편

내가 가진 모든 기억들 중에서, 발달장애인과 관련된 기억은 딱 두 개다. 하나는 초등학교 때 같은 아파트 꼭대기 층에 살던 발달장애인 오빠였다. 보통 사람과 다르게 웃고, 자기에게 인사해주는 사람을 굉장히 좋아했던 모습이 왠지 생생하다. 다른 하나는 동네 도서관에서 자원활동을 할 때 자주 도서관에 놀러왔던 오빠였다. 나는 몇 년 동안 자원활동을 했고, 꽤 오랫동안 그 오빠를 봤다. 스무 해 동안 살아오면서 발달 장애에 대해 그들이 어떤 상황에 처해있는지 자세히는 알지 못했지만, 대강은 짐작할 수 있었다. 이들이 밖으로 나와 보통 사람들처럼 거리를 걷는 게 쉽지 않은 일이고, 그래서 잘 만나지 못한다는 것, 비장애인들의 사회로부터 소외되어 있다는 것, 이들이 우리 사회에서 발 딛고 서있을 공간이 매우 적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에게도 발달장애와 관련된 기억이 적고, 어떤 관점이 형성되지도 않았다.

인연썸머를 가기 전에도 아마 ‘발달장애인들은 이렇다!’ 는 편견만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인연썸머를 다녀온 지금도 그때와 별로 달라진 게 없다고 생각하지만, 발달장애 아이들과 노는 것이 비장애 아이들과 노는 것과 별로 다를 바가 없다는 생각이 순간순간 들었는데, 이것 역시도 잘 모르겠다. 분명히 다른 부분도 있기 때문이다. 아직은 발달장애, 혹은 포괄적으로 장애라는 것에 대해 치우친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느낌이 유쾌하게 가시진 않았다. 그냥 어린이들이었으면 ‘아, 놀아주는 거 너무 힘들어…’ 하고 조금 놀아주다가 쉬었을 지도 모르는데, 발달장애가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으니까. ‘조금 더 열심히 놀아 주어야겠다’ 는 생각이 들었는지도 모른다. 물론 고작 2박 3일 동안 모든 편견이 없어질 수는 없다. 그래도 편견이 깨졌다는 신호는 그 전의 내가 가졌던 하나의 편견에 대한 부끄러움을 느끼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인연썸머를 되돌아볼 때 여러 종류의 부끄러움이 고스란히 느껴지기도 한다는 것이다.

하나는 무지에 대한 것이다. 인연썸머에 오기 전까지, 실은 인연썸머가 끝난 지금에도 발달장애라는 것에 관해 어떤 관점들이 존재하는지, 혹은 장애학에 대해서도 아직은 거의 아는 게 없다. 이렇게 빤히 보이는 일인데 누군가 가르쳐주려고 시도하지도 않았다는 것에 약간 놀란다. 장애에 관련해서는 대학에 와서 「거부당한 몸」이라는 책의 몇 장을 읽은 것이 전부였다. 그 전까지는 장애학이라는 학문이 존재하는지도 몰랐었다. 입시 용어나 대학서열에 대해서는 빠삭하지만 장애학이라는 학문이 존재하는지도 모르는 스무 살이라니, 어떤 종류의 무지를 권하는 사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여전히 모르는 것에 대해 고민이 된다.

둘째는 다시 나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에 대한 부끄러움이다. 3박 4일 인연썸머를 하는 동안, 아이들이 이렇게 관심을 받고 마음껏 소리 지르며 뛰어다닐 수 있는 공간이 얼마나 될까 하는 생각을 했다. 물론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가 있고 인연맺기학교도 있지만, 그 시간 외에 아이들이 그냥 집에 있는 동안, 거리를 걸어 다니는 동안, 아파트 엘리베이터 안에서 마음대로 행동할 수 있을까… 이틀 밤 동안 적어 내려간 일기장에는 이렇게 여러 가지 질문이 적혀 있다. 나는 그런 고민을 뒤로 하고 나서 여전히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여전히 똑같은 삶의 패턴으로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

 

또 가고 싶다. 인연썸머.

또 다시 걱정을 한가득 안을 테지만, 기회가 된다면 다음에 또 가고 싶다. 짝꿍 선생님이었다면 지금과는 조금 다른 생각이 들었을 수도 있다. 이렇게 쉽게 다음에도 가고 싶다고 못하지 않았을까. 내가 이 아이에게 어떤 의미인지, 또 2박 3일 동안 잠시도 쉬지 않고 누군가와 함께 있어야 하는 아이에 대한 고민이 깊었을 것 같다. 같이 공존하며 살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더 깊게 했을 것 같다. 물론 그렇더라도 아마 결론은 똑같을 것이다. 함께 살아야지. 우리가 사는 공간은 안타깝게도 아주 사소한 물건 하나하나도 비장애인들에게 맞추어져 있어서 함께 살기가 어려다고 생각한다. 왼손잡이용 가위가 존재하는 것처럼, 발달장애도 하나의 다름으로 인정받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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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글에 나오는 참가어린이의 이름은 가명으로 기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