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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이동 사람책_소개
: 포이동 재건마을 주민 구술기록자원활동 <포이동사람책프로젝트>

 

포이동 재건마을, 그 사람들을 만나다 ① 들어가며

 

* 사단법인 평화캠프 서울지부에서는 포이동 재건마을(현 개포동 1266번지) 주민 인터뷰 자원활동, ‘포이동 사람책 프로젝트’를 2015년 하반기에 진행하였습니다. 구술을 토대로 각각의 주민들의 삶의 이야기를 듣고, 마을의 역사와 주민들의 개인사를 엮어내는 것이 이 프로젝트의 목표였습니다. 그간 진행된 주민들의 인터뷰를 토대로 <포이동 사람들>을 연재합니다.  이 기획물이 포이동 재건마을에 대한 여론을 환기하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들어가며

2015년 10월 11일, 포이동 재건마을에 10여명의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이날은 ‘포이동 사람책 프로젝트’의 첫 모임인 발런티어학교가 열린 날이었습니다. 서로 경험도 살아온 배경도 달랐지만, 포이동 주민들의 요구를 알리고 싶다는 같은 마음으로 모였습니다. 평화캠프 자원활동론에 대한 강의를 서울지부 사무처장님이 진행하였고, 이어서 오준호 작가님이 ‘인터뷰의 의미와 방법’에 대한 강의를 해주셨습니다. 오준호 작가님은 2006년 포이동 주민 인터뷰를 하신 경험이 있고 세월호 유가족들과의 인터뷰를 르포 ‘세월호를 기록하다’라는 저서로 풀어낸 분입니다.

‘사람책 프로젝트’가 순탄치만은 않았습니다. 책을 냈으면 좋겠다는 의견부터 만화 같은 예술창작물을 만들어 보자는 의견까지, 마을의 집단적인 역사를 기술하자는 의견부터 주민들 하나하나의 삶에 집중하자는 의견까지 자원활동가들 사이에서는 갑론을박이 오고갔습니다. 주민들을 만나 인터뷰를 하기 시작하면서, 포이동 사람책 프로젝트 역시 조금씩 구색을 갖추어 갔습니다. 인터뷰는 점점 더 편한 공간이 되었고, 자원활동가들은 주민들의 삶과 역사를 조금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포이동 재건마을의 역사

포이동 재건마을은 1981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약 30여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박정희 정부는 전쟁고아, 빈민, 넝마주이 등에 의해 산발적으로 이루어지던 폐품 사업 등을 관리하기 위해 근로재건대를 만들었는데, 이것은 1979년 자활근로대로 명칭이 변경되어 서초동 정보사 뒷산에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잦은 알력과 권력다툼, 주민들의 민원 등으로, 자활근로대는 1981년도에 10개 지대로 서울 각지역에 분산되었고, 그 중 한 개 지대가 포이동 200-1번지에 이주하면서, 포이동 재건마을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이주 초기에, 주민들은 비닐하우스에서 거주했고, 양재천이 범람하면 고지대에서 살다가 범람이 잦아들면 다시 내려오는 생활을 반복했다고 합니다. 식수가 없어 양재천 물을 떠다 먹고, 100가구가 하나뿐인 공동 화장실을 이용하는 등 생활조건도 열악했습니다. 당시 주민들은 대부분 넝마주이(고물) 일을 하고 있었는데, 자활근로대의 왕초는 주민들이 넘치거나 모자란 수익을 올릴 때면 욕설과 폭행을 가했다고 합니다. 경찰은 왕초의 폭력을 방관했을 뿐만 아니라, 강도나 절도 사건이 발생할 때면 주민들에게 그 죄를 뒤집어씌우고 강제연행, 고문을 일삼았습니다.

1999년의 토지구획정리사업을 통해 포이동 200-1번지는 266번지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나 왜인지 서울시는 주민들의 주민등록을 이전하지 않았고, 주민들은 대한민국 어디에도 없는 포이동 200-1번지의 주민들이 되었습니다. 포이동 주민들에게는 시유지 무단점유라는 명목으로 매달 20-40만원 가량의 토지변상금이 부과되기 시작했습니다. 30여년간 누적된 토지변상금은 가구당 7천만원에서 1억여 원에 이르는 규모로 쌓여 있습니다. 임대주택에 당첨되거나 생계유지를 위해 차량을 구입하는 경우 토지변상금을 이유로 자산이 압류당하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주민등록 등재, 토지변상금 철회

2000년대 초, 마을에 수도시설을 설치하는 문제로 촉발된 주민들의 분노는, 곧 주민등록과 토지변상금 문제로 옮겨갔습니다. 곧, 포이동 사수대책위원회가 결성되었습니다. 포이동 사수대책위원회의 투쟁은 험난했습니다. 강남구청에서는 구청 문턱을 넘기도 전에 끌려나오기 일쑤였고 서울시청과 강남구청 앞에서 진행한 일인시위는 외면당했습니다. 주민들은 “우리는 유령이 아니”라고 주장하며 강남구청 앞에서 흰 천을 뒤집어 쓰기도 했고, 대규모 마을 문화제를 열기도 했으며, 공직선거 후보자들을 따라다니는 그림자 시위를 벌이기도 했습니다.

2009년, 오세훈 서울시장은 포이동 주민들의 주민등록을 인정했고, 주민들은 개포동 1266번지로 주민등록이 등재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지변상금은 철회되지 않았습니다. 주민등록이 등재되었기 때문에, 주민들은 국민의 권리를 누릴 수 있게 되었지만, 토지변상금은 여전히 남아 주민들의 삶을 옥죄고 있습니다.

 

화마가 휩쓴 마을에서 새로운 싹을 틔우다

현실은 때때로 문학보다 더 극적이라고 합니다. 2011년의 포이동 재건마을만큼 그 문구를 웅변적으로 드러내는 사례는 없을 것입니다. 2011년, 마을에 큰 불이 났습니다. 소방서의 늑장 대응은 불을 더 키웠고, 마을은 거의 전소되었습니다. 화재로 잿더미가 되어버린 집을 보면서도 강남구청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강남구청은 주민들에게 이주할 수 있는 일련의 집 목록을 제시했는데, 이 집들은 사실상 사람이 살 수 없는 집이었다고 합니다.

구청에서의 지원을 기다리다 못해 주민들이 스스로 집을 짓기로 결정하고, 시민사회단체 활동가들과 교사들의 도움을 받아 샌드위치 판넬로 공부방을 짓고 있던 8월 말, 강남구청에서 보낸 용역깡패들이 포이동 재건마을을 덮쳤습니다. 용역깡패들은 주민들을 밀치고 욕설을 퍼붓고 짓고 있던 집을 부쉈습니다. 마을회관 3층에서 공동생활을 하고 있던 포이동 인연공부방의 아이들은 강남구청장에게 “쓰레기를 치워주고 용역깡패를 오지 못하게 해달라”는 편지를 썼습니다. 그렇게 집을 짓고 철거당하기를 수 차례, 불타버린 집들은 상당수 재건되었고, 포이동 공동체는 포이동 재건마을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갖게 됐습니다.

 

포이동 주민들과 알아가기

총 5명의 주민들과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사람책 프로젝트의 자원활동가들은 점점 포이동 주민들과 가까워져 갔습니다. 김용금님께 이주 초기의 역사에 대해 듣기도 했고, 김미선님과의 인터뷰에서는 아이들을 돌보지 못했던 부모들의 심정에 대해 들으며 눈물을 나누기도 했습니다. 유도관님과 인터뷰를 하면서는 마을이 형성되는 초기 주민들의 삶과 생계에 대해 들을 수 있었습니다. 함록용님과의 인터뷰 과정에서는 강남구청이 주민들에게 어떤 폭력을 행사했는지, 지금 어떻게 주민들을 몰아내려고 하는지 자세히 들을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장귀심님과의 인터뷰를 통해, 2011년의 화재가 주민들에게 남긴 깊은 상처를 엿볼 수 있었습니다.

포이동 주민들이 놓인 ‘사회경제적 배제’는 주위에서 쉽게 접하기 힘든 것입니다. 그러나 인터뷰를 하면서 자원활동가들은 주민들의 삶과 스스로를 연결했고, 때때로 어떤 따뜻한 공감의 분위기가 인터뷰 현장에 흐르기도 했습니다. 처음에 마을과 주민들에 대해 약간 낯설음을 느꼈던 자원활동가들은, 점점 더 주민들의 삶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연재될 글은, ‘포이동 사람책 프로젝트’가 세 달간 만들어낸 결과물입니다. 인터뷰도 기사 작성도 서투르지만, 포이동 재건마을 주민들을 이해하고 함께 호흡하며 삶을 나누고자 했습니다. 주민들 한분 한분의 삶이 담긴 기사가, 포이동 재건마을을 알리고 주민들의 바람을 담는 작은 계기가 되길 다시 한 번 바라봅니다.

 

/ 김재의 평화캠프 서울지부 포이동 사람책 프로젝트 코디네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