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단법인 평화캠프 서울지부에서는 2015년 하반기 포이동 재건마을(현 개포동 1266번지) 주민 인터뷰 자원활동, ‘포이동 사람책 프로젝트’를 진행하였습니다. 주민들의 이야기를 듣고 마을의 역사와 주민들의 개인사를 엮어내는 것이 이 프로젝트의 목표였습니다. 그간 진행된 주민들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총 5회에 걸쳐 연재하고자 합니다. 이 기획물이 포이동 재건마을에 대한 여론을 환기하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사진:박김형준>
포이동 사람책_포이동 재건마을 주민 구술기록자원활동
첫 번째 이야기 : 2조 조장, 김용금 님
2015년 10월 23일, 사람책 프로젝트의 첫 인터뷰가 있었다. 저녁 7시에 10명 남짓한 자원활동가들이 인터뷰를 준비하기 위해 마을회관 1층에 모였다. 주민들이 차려주신 밥을 먹고, 김용금 님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처음으로 진행하는 인터뷰였기에 모두 기대 반 걱정 반이었다.
김용금 님은 자활근로대가 아닌, 결혼을 통해 마을에 오시게 되었다고 한다. 마을이 형성되던 비교적 이른 시기에 마을에 오셔서 그 당시의 기억을 고스란히 갖고 계셨다. 인터뷰는 포이동 재건마을을 처음 마주하는 자원활동가들에게 마을의 역사를 설명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포이동 266번지’, 사람이 살게 되다
지금의 개포4동 1266번지, 포이동 재건마을은 원래 사람이 살던 곳이 아니었다. 개발독재 시절 정부의 강제 이주로 사람이 살 수 없는 땅에 마을이 만들어졌다. 하천부지에서 사람들은 척박한 땅을 일구고 양재천 물을 길어먹으며 마을을 일궜다. 그것은 철저히 통제 받는 삶이었다.
“처음엔 우리가 박정희 대통령 시절 79년도에 이 자활근로대 발대식을 해가지고 전국에 있는 부랑자들 있잖아요, 거리에 그런 사람들을 모아다가 서초구에 있는 정보사에 한 450명 정도를 모아서 집단 이주 시켜가지고 천막치고 거기서 정부가 관리를 했어요. 그러다 보니까 주변에서 민원이 자꾸 일어나, 다른 데로 옮겨라 그래가지고 그때 1981년 12월 21일 우리가 여기 1-2지대로 우리가 왔어요. 우리가 온 게 아니고 저기 버스에다가 태워가지고 데려다 놓은 거지”
1981년 정보사에 있던 자활근로대는 뿔뿔이 강제이주되어 흩어졌다. 그 중 자활근로대 1-2지대 45명이 지금의 포이동 재건마을로 이주되었다. 이후에도 정부와 행정당국에 대한 빈민들의 포이동 재건마을로의 이주는 계속되어, 1989년 봄 개포4동 청사 건축으로 그 부지에 살던 14가구 이주, 1989년 여름 베트남전 상이용사 16가구 이주, 1998년 양재천 개발사업 중 공공주차장 부지에 살던 넝마주이 36가구 이주 등이 이루어졌다. 이렇게 해서 조성된 마을이 포이동 재건마을이다.
“그때 당시 여기가 마을이 아니라 하천부지로 있었을 땐데, 45명을 여기다가 실어 다 놨죠. 실어 다 놓고 니네들 살아라 했으면 괜찮을 텐데 그 사람들이 관리했어요. 여기 구청이나 경찰서나 그 사람들이 나와서 주민을 관리 감독을 했었거든요. 그래서 이제 고물 같은 거 주워오고 그러면은 경찰관들도 있고 허니까 자기네가 다 저울에다 달아. 그래가지고 이제 주민들은 몇 프로나줬냐면 ‘그냥 밥만 먹고 살아라, 너네들도 돈을 모아야 할 거 아니냐 우리가 관리를 해서 다음에 모아지면 주겠다’ 하면서 통장을 지네가 갖고 있는 거예요. 그 사람들이.”
86년 아시안게임, 88년 올림픽이 개최되던 시기에 정부는 ‘나라 망신시킨다’라며 낮에 주민들이 마을 밖으로 나가는 걸 금지했다. 그래서 낮에는 집에만 있다가 밤이 되어서야 먹을 걸 사러 나가고, 일도 밤에만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후 89년에 국가는 ‘자유롭게 살게 해준다’고 이야기하며 자활근로대 사표를 내라고 요구하고 자활근로대증을 다 수거해갔다. 그때 당시에 마을 주민들은 경찰관들, 하다못해 동사무소 직원들만 와도 무서워서 고개도 제대로 들지 못하고 하라는 대로만 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그렇게 해서 마을 주민들에게 돌아온 것은 약속한 ‘자유’가 아닌 ‘무단점유’라는 새로운 속박과, 그에 따른 토지변상금 청구였다. 당시 근로재건대 왕초의 말에 따라 다들 한 번씩 토지변상금을 냈다고 한다. 그 이후로 토지변상금을 낸다는 것이 무단점유를 자발적으로 인정하는 것 아니냐며 그 주민들이 전체적으로 내지 않았지만, 토지변상금은 계속해서 나왔다. 그러다가 2003년에 철거계고장이 나왔다. 당시 마을 위원장의 소개로 철거민 단체들과 연대를 하게 되었고 삶의 터전을 지키기 위한 투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포이동 재건마을에 오기까지
“우리 아저씨(남편) 아버지가 일찍 돌 되기 전에 돌아가셨어요. 우리 어머니가 그래가지고 아들을 데리고 시집을 가셨어요, 누가 소개를 시켜줘 가지고. 그 어린 아들을 데리고 시집을 가셨는데 거기 가서 보니까 그 본처에게도 자식이 있을 거 아니에요. 다르게 대접을 해주니까 이 아버지부터 우리 아저씨가 일찌감치 서울로 도망을 왔어요. 우리 아저씨가 그때 17살, 18살이나 되었을까. 그 정도에 서울을 와서 살았는데, 근데 나는 이런 생활하는 건 몰랐지. 그냥 서울에 있다니까, 시골에서는 그때 당시만 해도 서울에 가서 살면 다 잘사는 줄 알아. 옛날 어르신들은. 그래가지고 서울에 산다니까 시집 가라고가라고 해 싸서 사람만 보고 결혼을 일단 했었어요. 근데 나는 안 올라왔어. 여기를.”
결혼은 했지만 김용금 님은 남편과 떨어져 생활을 시작했다.
“내가 23, 24살 때 결혼을 했어. 난 늦게 왔어. 이 동네 오기를. 난 안 들어올라 그랬지. 여기를. 나는 장성에 있었지요. 시댁에. 전라남도 장성. 내장산 밑에. 나는 거기서 살고 우리 아저씬 여기 서울에 있고. 그래가지고 이 동네를 가라고가라고 했었는데 그때 당시만 해도 여기를 진짜 안 올라고 안 올라고 버티고 있다가 89년도에 나는 여기를 왔었어요. 87년도 처음 여기 와서 한 번 보고는. 에에 그때 와서 보니까 못 쓰겄더라구 오면 안 되겠어. 그래서 안온다고.”
87년 처음 마을을 보았을 때와 89년 마을을 처음 왔을 때의 이야기가 교차하며 이어졌다. 동정사 사람들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89년 개포4동 동사무소를 짓기 위해서 강제 이주된 무허가 가옥주에 살던 원주민 14가구이며, 그해 여름에는 베트남전 참전했던 상이용사의 16가구도 강제 이주되었다.
“그때만 해도 이제. 그때는 89년도 내가 3월 달에 왔었는데 전체적으로 동정사 사람들이 이사를 안 왔어. 그때는 몇 집만 1월 달에 와서 집 지은 사람이 있었고, 집을 아직 안 지은 사람도 있었고. 그 사람들 동정사 사람들. 또 상이용사들도. 암튼 동정사는 내가오니까는 그때 당시 집 짓고 있는 사람도 있었어. 뭐 그냥 집들이 다 저렇게 생겨가지고 다닥다닥 다 붙어서 있고 한번 와봤는데 죽어도 오기가 싫더라고. 그래서 안 오려고 버티고 있다가 집 다 지어놓고 해 놨길래 이제 할 수 없이 왔지.”
마을에 선뜻 올 수 없었던 이야기를 좀 더 들을 수 있었다.
“그렇지. 그때만 해도 무서웠지. 감독하는 사람들. 저런 속에 가서 어떻게 사나 싶고 오기가 싫어서 안 올라고 버티고 있다가 그래도 할 수없이 왔지. 또 어떡해요. 그렇게 와서 살다 보니까 우리 딸도 90년도에 태어났고. 근데 삶이 뭐 그냥 비참허지. 맨 그 고물이나 주어다가. 그렇게 얼마나 많이 벌어져요, 그게? 얼마 안 벌어지지 돈이. 그러다 보니까 우리 아저씨는 그 좀 지저분한 일만 허다 보니까 인제 일이 끝나면 이걸 많이 먹게. 술을 많이 먹게 되잖아요. 그렇게 살다가 뭐 여기서 사는 게 나는 그 자체가 싫어가지고 울고. 진짜 울기도 많이 울었었고. 가고 싶다고 해도 또 신랑이 여기 있으니 어떡하냐고. 안 간대는대. 빠져나갈 수도 없고. 거 맨날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니까 돈이 모아져야지. 돈이 우선 안 모아지니까 움직이지도 못하고 그냥 그냥 살고 있다가. 결국에는 우리 아저씨는 이제 저 돌아가셨지만. 그 삶은 그게 뻔하지, 뭐. 얘기 안 해도.”
“여지껏 친구를 데리고 온 적이 없어요”
“우리 지영(가명)이가 초등학교 다닐 때도 좀 소극적이고 막 이렇게 저러지 않아요. 말도 잘 안 해. 그런 거는. 근데 중학교 다닐 때 친구들 안 데리고 와. 절대 안 데려오고 여기서 산대는 걸 알리지도 않고. 여기 바로 중학굔데 돌다리만 건너오면 오는데 저 다리로 돌아서 오든지 요쪽으로 돌아오든지. 그렇게 돌아서 저 앞으로 앞 동네로 해서 들어와, 친구들 다 가고 난 다음에나. 아니면 근린공원 있지 저쪽에? 버스 저쪽 정류소. 거기서 이제 저는 놀다가 다 가고 나면 혼자 들어오고. 여지껏 친구를 데리고 온 적이 없어요. 자존심이 그만큼 강한 거지. 지 치부를 안 드러내려고.
못 사는 게 죄냐 이제 나는 맨날 그러지. 이런 데 살 수도 있고 그러지. 뭐. 그런 거를 챙피하게 생각하고 그렇게 친구들 안 데리고 오냐. 싫대는 거야. 저는. 여지껏 한 번도 안 데리고 왔어. 좀 짠하기도 하고 부모가 진짜 이런데 와서 이렇게 있으면서 남들처럼 대학교를 못 보내갖고 내가 그게 지금 한이 돼요.
우리 딸이 중학교 3학년 때부터 알바를 댕겼는데, 그래서 그 선생님하고 같이 공부도 못하던 이유가 알바가느라고 못했고. 시간이 또 안 맞고 그러다 보니깐 그랬지. 인제 집에 돈이 없으니까 내가 학원 같은 것도 못 보냈잖아요. 그러니까 여기(평화캠프 인연공부방)와서 공부를 해라 해도 걔는 중학교 3학년 때부터 그 알바 한다고. 집에서 돈을 땡전 한 푼도 나한테 달라 소리를 안 해. 걔도 인제 돈이 조금 저기 하면은 나 갖다 주면서 엄마 이거 쓰라고 또 갖다 주고.
그러더니 고등학교 졸업하고는, 아무튼 지가 또 알어서 디자인 고등학교 나왔잖아요. 그래서 인테리어 하는데 사무실을 나가더라고. 거기서 한 5년 일하고, 혼자서 공부도 많이 했대. 그래서 그쪽으로 쭉 나가라고 했지. 인제 회계사 그거 해보고 자격증 따고 내년에 취직 하겠대. 그래. 니 맘대로 해라. 니가 알아서 하니까. 내가 제대로 해준 게 없어서 기특하기도 허고. 내가 너를 안 낳았으면 어떡할 뻔했냐. 속으로 인제는 그러지. 잘해요.”
화재 이후, 주민들의 삶
2011년 여름, 포이동 재건마을에 화재가 발생했고 96가구 중 75가구가 전소했다. 처음엔 작은 불이었지만 초동 화재 진화를 제대로 하지 못한 탓이다. 그 여름, 화재가 난 포이동에 함께하러 온 청년들과 주민들이 몇 달간 공동생활을 하며 집을 다시 짓기 위해 노력했고 당시의 인연은 지금까지 ‘인연공부방’이라는 이름으로 이어지고 있다. 물론 포이동이 눈엣가시였던 강남구청은 주거복구를 허락하지 않으며 용역을 투입하기도 하고 짓고 있는 집을 부숴버리기도 했다. 주민들과 많은 시민의 노력으로 강남구청이 임시주택으로 인정하게 되었다.
“우리가 여기 사업장이 있었어요. 자활근로대 재활용 사업장이. 동네가 열 몇 군데가 있었는데 화재가 나서 지금은 하나도 없잖아요. 다 구청에서 쫓아내고 화재 안 난 데는. 아무튼, 연세 드신 분들은 할머니고 할아버지고 리어카 손수레 그런 거 끌고 다니시면서 그거 하시다가 갑자기 11년도에 화재가 나다보니까 있던 사업장도 쫓겨나고 그러니까 인제 돈벌이를 할 수가 없는 거예요, 할머니들은 뭘 주어서 싣고 가야하는데 멀잖아요, 고물상이. 그러니까 다 이제 손 놓고 계시잖아요. 이제 좀 어려운 분들은 전기요금 같은 거도 부담되요. 전에는 조금씩만 냈으니까. 왜냐하면, 우리가 전체를 십시일반으로 내주고 그런 것도 있었고. 전기나 수도요금 같은 거도. 그냥 서로 또 텃밭에서 뭐 심으면 노나 먹고 그러니까.”
현재 마을 주민들이 가꾼 텃밭은 강남구청에서 사용하지 못하도록 막고 있었다.
“거기도 솔직히 우리 화재 나기 전에는 주민이 살던 그 터전이었는데. 집터였는데. 걔네들이 그거 막아놨어. 구청에서. 펜스 쳐놓고 지금 못 지어먹게 해요. 아 올봄에 그랬구나. 작년에 씨앗 뿌려놨던 시금치, 그거를 올봄에 났으니까 이제 뜯어다 먹어야는데. 그거 뜯어다 먹는다고 용역들이 들어와서 그 실장하고 같이 용역들 끌고 들어와서 대여섯 명이 들어가서 그걸 죄다 발로 짓밟고 다니는 거예요.
밖에다가 저쪽 집이 그 할머니가 심어놓으신 게 있어요. 그 펜스 밑으로 조금 땅이 요 정도 된 거. 거기다 쭉 심어서 먹는데 거기도 세상에 다 짓밟아서 뽑아버리고, 땅에 구댕이를 파고해서 저쪽에 뭐 저기 이 판자 쪼가리 같은 거 있는 거 갔다가 거기다가 덮어놓고 짓밟고 그러고 댕기더라고 걔네들이. 그게 이제 주차장도 우리가 쓰는 주차장을 못 쓰게 해. 펜스 칠라고 하다가 우리가 지키고 있으니까 못했어요. 아직까지 안했잖아.”
김용금 님은 식당에서 일을 하거나, 요양보호사 일을 하신다. 주중에는 마을의 크고 작은 일들을 맡고 계셔서 토요일과 일요일에 일터로 향하신다.
“마을에 일이 있어서 주말에만 일해요. 간병인으로. 그 집은 따님만 다섯 분이야. 다섯 분인데 막내 따님이 나하고 동갑이야. 대단해 그래도. 딸들이 하루 저녁씩 바꿔서 와요. 간호하러 오셔서 자리를 지켜요. 나는 주말에만 가고. 주중 낮에는 요양사분이 또 있어요. 인제 아침 10시부터 6시까지. 8시간. 아직은 건강해요. 다행이야.”
“또 우리 몰래, 그렇게 하는 거야.”
2015년 1월 22일 강남구청장은 ‘부구청장 밑에 두는 도시선진화담당관을 한시기구로 설치’하는 ‘서울특별시 강남구 행정기구 설치 조례 일부 개정안’을 제출하였다. 그리고 2월 27일 주거환경개선과 도시개발사업 추진을 위해 ‘도시선진화담당관’을 신설하였다. 강남구청의 도시선진화담당관은 ‘시민의식 선진화팀’, ‘구룡재건마을 정비팀’,‘달터수정마을 환경개선팀’로 구성되어 있으며, 현재는 포이동 재건마을까지 드나들며 영향을 주고 있었다.
“외적으로. 아 뭐 구청장이 자꾸 우리를 못살게 굴어. 완전히 못살게 이렇게. 오늘도 또 왔다갔어 용역대장이. ‘야, 그거 찍지마라. 왜 맨날 날마다 와서 찍냐’고 여기 막 찍어가고 했었어. 그러면 ‘아, 우리는 여기 보고해야 되니까 어쩔 수 없어요.’ 보고하면 뭘 해. 직원들 바뀌면 전임자가 했으니까 ‘우리는 모릅니다’ 모르쇠로 나가고 맨날 그러는데. 그거 갖다가 보고하면 뭐 할거야.
‘아이고 그래도 구청장님 왜 전 구청장님은 잘해 주셨잖아요?’ 그러면서 ‘혹시 알아요. 이 신연희 구청장님 가고 나서 다른 사람이 되면 또 뭐가 바뀔지. 어떻게 알겠어요.’라는 거야 잘해줄지도 모른다고. 그래서 보고를 잘 해놔야 된다고. 그래서 ‘아, 시끄러. 그런 소리하지 말고 그냥 가.’ 이랬지. ‘갈게요.’ 그러고 가더라고. 그래도 날마다 와서 사진 찍어가고 그래. 자동차도 찍고.
주차장. 거기에서 벌써 삼 십 몇 만원씩 된 거 나왔잖아. 벌써. 거기서 찍어간 사진들로. 불법주차라고 그게. 미친놈들이지. 주민이 몇 십 년 쓰던 주차장을 이제 와서 불법이라고 또 그걸 갖다가. 마을 안에 있는 자동차까지.
주차 단속하는 사람들 아니고. 구청에서 지네들이 와서. 그것도 용역들 시켜서. 엊그저께도 한 번 와서 그냥 한바탕 하고 갔지. 도시계획과 갔어요. 압류 때문에요. 그 때 갔는데 가니까 거기는 자기네들은 모른다는 거야. 도시계획과에서는 ‘우리는 모릅니다. 선진화 사무실로 가세요.‘ 라고 하대. 포이동 재건마을에서 왔다고 하니까 대뜸 거기로 가라는 거야. 무슨 이유로 뭔지도 모르고 민원인이 왔으면 왜 뭐 때문에 왔는지는 물어봐야 될 것 아니냐. 무조건 그리 가라고 그러면 그게 말이 되냐고 했죠. 나중에 거기 직원이 왔어. 우리는 얘네들 깡패니까 인정 안한다. 깡패들이 우리하고 같이 일을 해결할 것도 아니고.
이제 건수만 있으면 토지 변상금하고 연결을 시켜요. 구청에서. 그래갖고 원래는 압류는 되어 있지만은 실행은 안 하기로 그렇게 약속을 한 것도 그 세무과에 가서 문중 선산까지 얘네들이 압류를 하려고 보내고 있는 거야. 그 형제분들은 아무 것도 모르잖아. 이런 거 통지가 날라 왔는데 어떻게 된 사건이냐고. 늘 그래. 또 우리 몰래. 그렇게 하는 거야.”
포이동 재건마을 주민들에 대한 강남구청의 압박은 계속되고 있다. 원래 주민들이 살던 집터였고 지금은 텃밭, 주차장으로 사용되는 곳을 금지하고 빼앗으려 한다. 매일 하루에 한 번씩 용역과 구청직원이 사진을 찍어간다. 매일 누군가는 와서 감시하는 마을, 포이동 재건마을. 무엇보다 강남구청은 담당 부서를 바꿔가며 이전에 주민들과 한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 국가 권력은 오늘도 다른 얼굴로 마을에 와서 말한다. 이곳에 살 수 없으니, 떠나라고. 여전히 옥죄는 토지변상금.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 2015년 10월 23일 인터뷰는 마을주민 김용금 님과 함께 진행되었습니다. 문경원, 한승윤, 김민선 님이 인터뷰 녹취 및 녹취록 정리, 문경원 님이 기사 작성을 맡아 주셨습니다.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질문을 주도하여 자원활동가들과 포이동 주민들의 어색한 골을 메꿔 준 평화캠프 고양지부 신지혜 코디와 포이동 사진들을 흔쾌히 허락해주신 작가 박김형준 님께도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