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장애와 가난을
더이상 증명하고 싶지 않습니다.

– 한국판 ‘나, 다니엘 블레이크’ 선언 행동

신지혜 / 평화캠프 고양지부 사무처장

지난 2월 15일, 사회보장위원회가 위치한 국민연금공단 벽에 스프레이로 뿌린 글씨들이 흩날렸다. ‘나, 박경석 개가 아니라 인간이다.’ 휠체어를 이용하는 장애인이자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대표를 맡고 있는 박경석 대표는 왜 ‘개가 아니라 인간이다’라는 당연한 말을 국민연금공단에 적었을까?

박경석 대표는 이 행동의 이유에 대해 ‘나, 다니엘 블레이크’ 영화를 본 후 주저 없이 행동했다고 수줍게 고백했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2016년 12월에 개봉한 영화다. 평생 목수로 살아온 주인공 다니엘 블레이크는 지병인 심장병이 악화되어 일을 할 수 없는 상황이 된다. 당장 생계가 급한 다니엘은 질병수당을 받기 위해 관공서를 찾아가지만, 복잡한 접수과정이나 일을 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적합하지 않은 과정에 대한 요구로 질병수당 대상이 되지 못한다. 다니엘은 부조리한 복지체계로 자신을 좌절에 빠뜨리는 관공서 벽에 ‘나는 다니엘 블레이크, 굶어 죽기 전에 질병수당 항고 날짜를 잡아달라고 요구한다.’라고 자신의 요구를 적었으며, 바로 이 장면은 이 영화의 명장면으로 남았다.

겨울바람이 매서운 날, 장애인과 가난한 사람들이 국민연금공단 벽에 ‘개가 아니라 사람이다’, ‘게으름뱅이도 거지도 아니다.’, 그리고 ‘하찮고 쓸모없는 존재가 아니다.’ 등의 글귀를 남겼다. 더이상 가난과 장애를 증명하고 싶지 않다는 이 메시지는 한국 복지의 현주소다. 얼마나 가난한지, 얼마나 노동을 할 수 없을 만큼 장애가 심한지, 그리고 이 사회에서 얼마나 의지할 곳 없는지를 증명해야만 기초생활보장 수급자가 되고, 1급에서 6급까지 있는 장애등급을 받을 수 있다. 선거 때마다 후보들은 ‘부양의무제 폐지’, ‘장애등급제 폐지’를 약속하지만, 한국의 사회보장제도는 ‘효율’을 이유로, ‘비용’을 이유로 줄어들고 있다. 복지가 줄어들수록 죽어가는 장애인과 가난한 사람들은 늘어가고 있다.

국민연금공단 벽에 ‘개가 아니라 사람이다.’라고 쓴 대가는 쓰라리듯 아팠다. 국민연금공단은 박경석 대표에게 외벽 훼손을 이유로 271만 7천 원을 배상하라고 공문을 보내며, 배상하지 않을 경우 법적 절차를 밟겠다는 통보를 했다. 그 공문에는, 차디찬 바람을 맞으며 요구했던 ‘사회보장기본법 개정’에 대한 답은 없었다. 배상을 통보받을 때는 인간이지만, 요구사항을 전달할 때는 인간이 아닌 수모를 또다시 겪은 것이다.

겨울을 지나 봄이 왔다. 4월 20일, 장애인차별철폐의 날에 또 다시 장애인들은 거리에서 외친다. 낙인의 사슬인 장애등급제를 폐지하라고, 빈곤의 사슬인 부양의무제를 폐지하라고, 그리고 시설 밖에서 자유로운 삶을 살고 싶다고. 10년이 넘게 외치는 이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할 국가는 어디에 있는가. 얼마나 더 많은 사람들이 죽어야 하는가. 2012년 8월 12일부터 지금 이 날까지, 광화문역에서 농성을 하고 있는 장애인들은 대답 없는 질문을 계속하고 있다. 그리고 대답 없는 국가에 계속 요구하고 있다. 사람으로 살고 싶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