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이동재건마을주민구술기록자원활동 <포이동 사람책>]
사단법인 평화캠프 서울지부에서는 2015년 하반기 포이동 재건마을(현 개포동 1266번지) 주민 인터뷰 자원활동, <포이동 사람책 프로젝트>를 진행하였습니다. 주민들의 이야기를 듣고 마을의 역사와 주민들의 개인사를 엮어내는 것이 이 프로젝트의 목표였습니다. 그간 진행된 주민들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포이동 사람들>을 연재하고자 합니다. 이 기획물이 포이동 재건마을에 대한 여론을 환기하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흔히 사람들은 어른이 되려면 무엇보다 부모님으로부터 독립해야 한다고 하지만 이는 말처럼 쉽지 않다. 하지만 함록용씨는 어린 나이임에도 집에서 나와 사회생활을 하며 스스로 돈을 벌고, 가족들을 챙겨주기까지 했다. 어릴 적부터 일을 하면서 수많은 일을 겪고, 그만큼 경험도 많아서인지 그에게선 갖은 고생과 경험을 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단단함이 보였다.
포이동에 오게 된 계기
함록용 씨는 자활근로대 때부터 포이동에 온 것은 아니었다. 포이동과의 첫 인연의 시작은 고물상을 하면서였다. 군대 제대 후 아는 사람의 소개로 고물상 일을 하게 되었는데, 지인이 일을 그만두면서 아예 고물상 일을 전임했다고 한다. 함씨는 91년에 지금의아내분과 결혼을 하고 계속 고물상 일을 해왔는데, 이후에 사업을 확장하려다 적지 않은 돈을 부도 맞았다. 돈을 떼먹을 수도 있었지만, 정직하고 바르게 살자는 생각에 사람들에게 돈을 다 돌려준 함씨는 포이동에 있는 주민 한 분에게 받을 돈을 집으로 보상받아 그때부터 포이동에 살게 되었다.
왜 포이동재건마을 일에 앞장서게 되었을까
“‘강남구청의 상식선에서 통하지 않는 행동을 보고 이걸 갖다가 좀 표현해야겠다, 뒤에서 가만히 지켜보는 것보단 앞장서는 게 낫지 않을까’해서 같이 하고 있습니다.” 평소 상식을 좋아한다는 함씨는 강남구청의 이런 상식선에 안 통하는 행동을 보고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앞장서야겠다고 생각해 2011년 화재 이후부터 마을을 위해 힘썼고 2012년부터 마을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고 한다.
“비록 서울시 땅이지만 내가 집 짓고 살던 곳에, 내가 주거하던 곳에 불이 났다고 해서 집을 지을 수 없다는 법, 그리고 이 사람들을 전부 쫓아내야 된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 저는 옳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함록용님의 목소리에는 당당함이 들어있었다. 절대 화재 복구가 불가능하다는 강남구청의 말에도, 수차례의 강제철거 및 용역들의난입에도 그는 꾸준히, 그리고 굳건히 마을을 지켰다. 함씨는 일을 하고 있고, 대표님이나 조장님들이 이러한 상황을 잘 막고 있지만 그래도 함씨는 나머지 부분을 채워가며 그동안 살아오면서 모든것을 이곳 포이동에 집중하고 있다고 했다.
그 동안 포이동재건마을의 상황
함씨 말에 의하면 초기 화재는 7,8 가구정도뿐이 불이 안 번져서 쉽게 불을 끌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이해가 안갈 정도로 불이 한 바퀴를 돌아 싹 다 탔다고 한다. 소방헬기가 떠서 산에 불이 붙지 말라고 물을 뿌리긴 했지만 정작 포이동 불은 끄지 못했다. 함씨는 처음 출발한 소방관들은 자신과 함께 열심히 불을 껐지만 그 이후에는 ‘차가 못 들어온다, 앞에 있는 소방차 물이 떨어져서 물이 없다, 소방차 도로 진입이 안된다’ 등등 이유를 대며 불을 열심히 끄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결국 다음날이 되서야 완전히 불이 꺼진 것이다. 화재 이후에도 고생길은 여전했다. 강남구청은 화재가 난 집들을 절대 복구할 수 없으니 외부로 나가라고, 임대주택을 알아봐주겠다고 했다고 한다. 그리고 1차 강제철거 때는 무려 15명 정도의 용역이 낮도 아닌 새벽 5시경 들어와서 마을 주민 모두가 힘써 지은 집을 모두 부시고 갔다고 한다. 그나마 공부방은 지켜내야 한다는 결의에 공부방은 1차 강제철거에서 지켜낼 수 있었다고 한다.
화재 이후 대책본부가 꾸려지고, 주거복구공대위가 꾸려지면서 여러 시민단체들이 같이 포이동 일에 합세했다. 신문, 텔레비전, PD수첩 등등 덕에 포이동 재건마을의 힘든 상황이 바깥으로 많이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고, 이 덕에 전국 각지의 여러 단체들, 하다못해 아주 소규모 지방 대학에서도 따로 지원이 왔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감당해낼 수 없는 일들을 이런 연대의 힘으로 이겨 낼 수 있어 힘들지만 행복했다고 그는 말했다. 현재까지도 강남구청이 주차장을 내놓으라며 압박을 넣고, 용역들이 와서 주차장을 감시하고 있지만 포이동 주민들은 이에 지지 않고 맞서고 있다.
부당함에 맞서겠다는 의지를 보면 그가 대인 공포증이 있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하지만 실제로 그는 5~60명 정도의 인원 앞에서 서서 이야기를 하려고 하면 가슴이 너무 떨려 쉽지 않고대본의 글씨가 안보일 정도로 대인공포증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살면서 언제든 큰 무대를 쓸 수 있으니 이를 극복해야겠다고 생각해 JCI(Junior Chamber International)을 하면서 이를 극복했다고 한다. 2004년 송파 청년회의소에 가입을 하고 2009년에 회장까지 한 그는 각종 행사에서 환영사 등으로 연단에 자주 서면서 대인 공포증을 극복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런 경험은 마을 공동대표를 하며 포이동을 지키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가족이야기
두 딸과 한 아들의 아버지로서 그는 포이동 공부방에 상당히 감사하고 있다고 했다. 아이들을 좀 더 좋은 곳에서 못 키운 것에 대한 미안함이 있었는데, 아이들의 그런 부족함을 평화캠프에서 많이 채워준 것 같아 감사하다고 했다. 함씨의 큰 딸만해도 중1때 수학을 잘 못했는데, 그때 선생님 한 분을 잘 만나서 중학교 졸업할 때까지 수학에서 거의 한 문제 이상 틀린 적이 없다고 했다. 함씨의 자녀 모두 공부방을 아직까지 좋아하고 있고 성인이 된 후 공부방에서 아이들과 함께하기도 했다고 한다.
“지금, 아주 즐겁지는 않지만 재미있게 잘 살고 있습니다.”
그는 집안의 가장이지만 집안일도 도맡아 하고 있다. 심지어 빨래 널기와 개기는 가족 그 누구보다 잘 한다고 한다. 그가 보여준 빨래 넌 사진을 보니 모든 빨래가 길이에 따라, 종류에 따라 각을 맞춰 완벽하게 정리되어 있어, 그의 말이 사실임을 알 수 있었다. 포이동 마을에서도 처음 마을에 올 때부터 가족 모두가 쉽게 적응도 잘하고 마을 주민분들도 너무 잘 해주셔서 어려움이 없다고 한다.
고물상으로 만들어진 포이동과의 작은 인연이 포이동 공동대표까지 이어진 함록용씨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함씨의 용기, 굳건함에 놀라고 연대의 힘에 감동받았다. 함씨의 말을 들으면 도저히 견딜 수 없을 일들이 많은데 권력에 굴복하지 않고 힘을 모아 견디고 이겨내는 그의 모습이 너무 대단했다. 한 가정의 가장으로, 한 마을의 대표로 활동 하고 있는 함록용씨가 힘과 용기를 잃지 않고 포이동을 지켜냈으면 좋겠다.
2016년 1월 8일 인터뷰는 마을주민 함록용 님과 함께 진행되었습니다. 이의지, 배용진, 한승윤 님이 인터뷰 녹취 및 녹취록 정리, 이의지 님이 기사 작성을 맡아 주셨습니다. 포이동 사진들을 흔쾌히 허락해주신 작가 박김형준 님께도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